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국 공산반란 (문단 편집) == 전개 == > 미국 해병대는 1962년 7월 태국에 도착했다. 이 군대의 목적은 CIA로부터 훈련 받은 반공 민병대와 태국 경찰을 보강해 전쟁을 벌이고, 인근의 라오스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와 1961년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한 태국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막 임무를 마친 전직 CIA 외교관 존 퓨리포이를 태국으로 파견해 작전을 감독하고, 사릿 타나랏 태국군 야전 원수가 이끄는 군부가 집권할 수 있게 만들도록 했다. >---- > 워싱턴 불렛 p.81~82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 해병대가 주둔하게 된 것은 이들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1961년]] ~ [[1965년]] 사이에 17건의 정치적 암살을 감행했다. [[1965년]] 태국 보안군과의 교전이 일어났고, [[1966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태국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1966년]] [[4월]] 초 [[치앙라이]] 주에서 군대와의 충돌이 일어나, 태국군 16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966년]] [[상반기]] 동안에만 무장세력에 의해 45명의 보안요원이 죽고 65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72년]] [[1월]] 태국 정부는 6주 동안 12,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200명의 무장세력을 사살했다. 작전 중 태국군의 30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당했다. [[1972년]] 말에는 육군, 경찰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고있는 2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베트남과 유사한 방식의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전으로 태국 시민들의 공포심이 고조된 가운데 군대와 경찰은 좌익 시위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1979년]] 태국 공산당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과 베트남, 양측의 지원을 모두 받고있던 태국 공산당의 친베트남파는 분리되었고, [[1980년]] 반란이 크게 감소하였다. [[1983년]] 태국 공산당이 반란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내전이 종결되었다. [[분류:태국의 역사]][[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태국의 사건 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